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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소 불가침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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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과 == 조약 체결 당시 언론에 공개된 조약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독일과 소련, 양국은 10년 기한의 불가침 조약을 맺는다. * 독일과 소련, 양국 중 한쪽이 제3국의 공격을 받으면 다른 쪽은 중립을 유지하며 한쪽을 공격한 제3국을 일절 원조하지 않는다. * 독일과 소련, 양국은 상대방을 적대하는 단체에 가입하지 않는다. * 독일과 소련, 양국 간에 분쟁이 생길 경우 평화적 방법으로 해결한다. * 독일과 소련, 양국은 경제협력을 통한 상호이익의 증진을 도모한다. 해당 조약은 겉으로 드러난 부분만 언뜻 보면 군더더기 없이 매우 깔끔하고 무난한 불가침조약이었다. 그러나 언론에 공개된 위의 내용은 껍데기에 불과했고, 공개되지 않은 아래의 밀약이 바로 이 조약의 핵심이었다. [[파일:attachment/docso.png]] 왼쪽은 비밀조항에 의한 국경선, 오른쪽은 실제로 분할된 국경선이다. * 독일과 소련 양국은 [[폴란드 제2공화국|폴란드]]를 [[독소 폴란드 점령|절반으로 분할]]한다.[* 조약 원문은 이렇게 노골적인 표현은 아니고 "폴란드에 중대한 정치적 변동이 있을 때, 독일과 소련의 양국의 영향력의 경계선은 피사 강, 나레프 강과 비스툴라 강, 산 강을 기준으로 한다."는 식의 완화된 표현으로 기록되어 있다.] * 소련은 [[루마니아 왕국|루마니아]]령 [[베사라비아]](지금의 [[몰도바]])를 [[소련의 베사라비아·북부코비나 점령|차지한다]]. * 양국은 [[발트 3국]]을 분할하여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는 소련이, [[리투아니아]]는 독일이 각각 [[발트 3국 점령|차지한다]]. * [[핀란드]]는 소련이 차지한다. * 소련과 독일은 서로 필요한 여러 물자를 다수 지원한다. 양국은 서로간의 사정상 밀약을 철저하게 준수[* 일단 소련은 [[이오시프 스탈린]]이 [[대숙청]]을 하면서 [[핀란드]]를 노리던 도중이었고, 나치 독일은 폴란드와의 국경 분쟁지를 노리던 도중이었다. 문제는 소련으로써는 나치 독일까지 신경쓰기에는 국가 내부가 좀 그랬던데다 나치 독일도 폴란드를 먹는 순간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을 선포할 테고, 소련도 자극해서 참전하게 되면 [[제1차 세계 대전]]처럼 양면전선 꼴이니 망할 게 분명한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양측은 서로간의 이해관계가 정확히 맞게 되자 일단 자국의 내부 사정으로 인해 불가침조약을 깰 이유가 없었기에 준수한 것이다. 후일 나치 독일은 프랑스까지 먹으며 승승장구하게 되는데, 영국이 상륙하지 않는 이상 양면전선이 생길 위험이 적어지자 나치 독일은 바로 뒤통수를 치며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소련에게 선제 공격을 가한다.]했다. [[폴란드 침공]]에서 독일과 소련은 공동작전으로[* 독일군의 침공에 발맞춘 소련의 폴란드 침공은 폴란드의 조기 패망에 큰 역할을 했는데, 독일은 2주도 안 되어 [[바르샤바]]에 도달했지만 바르샤바 시민들과 폴란드군의 강력한 저항에 고전하고 있었다. 여기서 소련이 뒤통수를 친 덕에 폴란드의 후방이 붕괴되어 폴란드 동부군의 대독일 전선 지원이 차단되었다.] 폴란드를 분할했으며, 이후 독일의 묵인 아래 소련의 압력을 받은 [[루마니아]]는 베사라비아에 북부 부코비나를 얹어서 소련에 반환했다. 변경점으로는 발트 3국이 소련의 협박에 모조리 소련에게 넘어갔는데[* 1939년 9월에 협약이 재조정되었다.], 폴란드 침공 당시 독일군이 소련령으로 합의되어 있던 바르샤바 주 동부와 루블린 주까지 차지하자 원래 독일이 먹기로 합의된 [[리투아니아]]를 소련에게 넘겨주었다. 한편 핀란드는 통째로 소련에 넘어가기로 되어있었으나, 소련이 핀란드를 접수하기 위해 쳐들어간 [[겨울전쟁]]에서 핀란드군이 크게 선전하며 소련군은 예상치 못한 피해를 입으면서 계획에 큰 차질이 생겼다. 핀란드가 국력의 격차를 넘지 못하고 항복하며 영토의 11% 정도(산업 능력의 30%)를 소련에게 넘겨주었지만, 소련에게 통째로 먹힌 발트 3국과는 달리 소련에게 흡수되는 운명은 면했다. 간신히 살아남은 핀란드는 추후 [[독소전쟁]]에서 [[계속전쟁|독일 편에 붙었다]]. 물자 지원도 이전에는 소련에서 일방적으로 퍼준 것으로 취급했지만, 현재 연구로는 나치 독일에서 난방용 석탄(연간 300만 톤), 최신 기계류(엔지니어 파견 포함), 발전설비, 방산 기술([[비스마르크급 전함]] 설계도, [[아트미랄 히퍼급 중순양함]] 5번함 뤼초, [[자이스]] 광학설비, [[PaK 36]], [[He 100]] 프로토타입, [[Fi 156]] 등)이 소련으로 넘어가면서 나치 독일의 일방적인 흑자는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일방적인 흑자는 아니었어도 나치 독일이 이득을 본 것은 사실이다. 나치 독일의 대 소련 수입액은 3억 1,800만 마르크인 데 반해 대 소련 수출액은 5억 3,600만 마르크였고[* 독일이 2억 1,800만 마르크의 이득을 본 셈이다.], 독일이 소련에게 보내주는 공급량은 소련의 공급량과 비교하면 57~67% 정도밖에 안 되었다. 자세한 내막에 대해 알아보자면 소련은 나치 독일에게 막대한 원자재와 전략 자원들을[* 220만 톤의 농업 생산물, 100만 톤의 석유와 목재, 2만 6천 톤의 [[크로뮴|크롬광]], 1만 4천 톤의 [[구리]], 3천 톤의 [[니켈]], 500톤의 [[몰리브덴]]과 [[텅스텐]].] 보내주었고 소련의 철도망과 수로, 항구를 이용하고 영토를 통과할 수 있는 권리를 주어 연합군의 경제 봉쇄를 무력화할 수 있게 해주었지만, 나치 독일은 보내주기로 약속한 각종 기계와 설비, 기술을 매우 불성실하게 보내주었다.[* 독일은 기한도 자주 어겼고 수량도 잘 지키지 않았지만 소련은 기한과 수량을 철저하게 지켰다.]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 개전 직전에 이뤄진 독일의 물자 공급은 거의 사보타주 수준이었고[* 대표적인 예시를 들자면 독일은 소련에게 순양함 류트조프를 인계해주기로 했는데 각종 기계장치와 장비 없이 선체만 보내주었고, 1943년에 인수를 마무리짓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그리고 독일은 1941년에 가장 많은 물자를 보내주기로 약속했지만 6월 22일에 소련을 침공했다.], 독일은 바르바로사 작전을 시작하기 몇 시간 전까지도 소련이 보내주는 물자를 꾸준히 받아챙기다가 통수를 치고 소련을 침공했다. 이 조약의 체결로 나치 독일은 서방 국가들과 전쟁을 하더라도 소련의 개입을 차단하여 양면전쟁을 피하는데 성공하면서 불과 8일 뒤에 [[제2차 세계 대전|인류 역사상 최대의 전쟁]]이 [[폴란드 침공|터지고 말았다]]. 그 첫 번째로 폴란드를 침공하여 소련과 나눠먹은 이후 [[프랑스 침공|폴란드 침공 종료 8개월 후에는 프랑스를 항복]]시켰고 최전성기를 달리게 되었다. 소련도 동유럽에서 확보한 지역을 발판으로 세력을 크게 키웠으며, 나치 독일과 함께 세계 구도 차원에서의 세력 분할을 염두에 두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의 야욕은 마침내 동쪽으로 향하기 시작했고, 1941년 6월 22일, 나치 독일은 독소 불가침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소련에게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은 채 [[바르바로사 작전|소련을 기습 공격]]했다. 이것이 바로 독소전쟁의 시작이었다. 독소 불가침조약의 대가로 스탈린이 나치 독일에게 넘겨준 것은 원자재와 전략 물자들만이 아니었다. 소련이 불순하다고 생각한 독일 공산당원 명부도 넘어갔고, 나치 독일에서 은신하고 있던 여러 명의 독일 공산당원들이 투옥되거나 처형되었다. 이들은 트로츠키주의자로 간주된 자들로 스탈린이 별로 쓸모없다고 생각한 자들이었다.[* [[독일 공산당]]은 나치에 의해 해산되기 전까지 36만 명의 당원을 가지고 있었다. 당연히 이들이 모두 처형된 것은 아니었다.] 비단 이들뿐만 아니라 자국으로 망명한 독일인 중에서도 스탈린 체제에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된 자들은 독일로 바로 송환했고, 이들은 당연히 송환되자마자 투옥되거나 처형되었다.[* 스탈린에게 충성하는 독일인들은 당연히 송환되지 않았고, 이들은 독소전 때 소련을 위해 일했으며 독소전이 끝나자 [[동독]] 정권을 세우는 데 일조했다.] [[독일 본토 항공전|연합군의 독일 본토 폭격]]이 심화되던 1943년, 중요 기밀 문서들이 소실될 것을 우려한 리벤트로프가 1933년 나치 집권 이후 작성된 9,800여 장에 달하는 독일 외무부의 기밀문서들을 [[마이크로필름]] 형태로 보존처리할 것을 지시했다. 전쟁 후반 [[베를린]]으로 진격해오는 소련군을 피해 외무부 부서들이 [[튀링엔]]으로 이동할 때 마이크로필름 관리 담당 공무원이었던 카를 폰 뢰슈(Karl von Lösch)는 상부로부터 마이크로필름을 파기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뢰슈는 마이크로필름을 파기하지 않고 대신 자신의 신변 보장을 위한 보험으로 마이크로필름을 헤센 주 마르부르크의 숲에 몰래 묻어두었다. 전쟁이 끝나고 뢰슈는 서방 연합군에 접촉해 신변 보장을 조건으로 외무부 기밀문서의 마이크로필름이 묻혀있는 장소를 알려주겠다고 거래를 제안했고, 거래를 받아들인 서방 연합군은 뢰슈의 도움으로 마이크로필름을 발견하였는데 그 중에는 독소 불가침조약의 나치 독일 측 보유분의 복사본이 포함되어 있었다. 마이크로필름 해독 결과 독소 불가침조약에 기존에 알려진 조약 내용 외에 비밀조항이 있었음이 밝혀졌고,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그 내용이 만천하에 공개되면서 비밀조항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덤으로 해당 필름에는 윈저 공 [[에드워드 8세]]와 나치 최고 사령부 사이에 오간 전보들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를 마르부르크 필름이라고 부른다. 이 마르부르크 필름에는 상당히 충격적인 내용이 있었는데, 에드워드 8세는 히틀러의 유럽 패권에 대한 시각에 동의하며 나치 독일에게 영국을 효과적으로 폭격한다면 영국의 전쟁 수행 의지가 꺾여 강화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하는 등 [[조지 6세|자신의 동생]]과 국민들은 독일을 상대로 사력을 다해 싸우는데 이를 뒤통수치는 친나치 서신이 담겨있었다. 왕실 측에서는 필사적으로 숨기려고 했으나 영-미 공동 연구진에 의해 복사본이 발견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당연히 에드워드 8세는 나치와의 내통 의혹을 생전에 부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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